휴머노이드 안전 기준, 넘어지는 로봇을 위한 규격은 아직 없다
공장 설비를 수리하기 전에 하는 일은 40년 넘게 같았습니다. 전원을 차단하고, 스위치에 자물쇠를 걸고, 꼬리표를 붙입니다. '멈춘 기계는 안전하다'는 이 원칙 위에 산업 안전 규정 전체가 서 있죠. 그런데 두 발로 선 휴머노이드는 전원을 끊는 순간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수십 kg의 금속 덩어리째 쓰러집니다. 기계를 멈추는 행위가 오히려 위험을 만드는 최초의 기계 앞에서, 지금 국제 안전 표준의 문법이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40년 된 안전 규격이 상정하지 못한 로봇
산업용 로봇의 안전은 ISO 10218이라는 국제 규격이 지켜 왔습니다. 지난해 나온 2025년 개정판은 20여 개국 전문가가 8년을 들인 결과물로, 2부의 안전 요구사항 분량이 28쪽에서 50쪽으로 늘었을 만큼 촘촘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꺼운 규격에도 깔려 있는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로봇은 바닥에 고정돼 있거나, 적어도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는 넘어지지 않는다는 가정입니다. 이족보행 휴머노이드는 다릅니다. 균형 제어 소프트웨어가 쉬지 않고 모터를 미세 조정해야만 서 있을 수 있고, 그 제어가 멈추면 즉시 쓰러집니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이런 기계를 '능동 제어형 안정성(actively controlled stability)' 로봇으로 따로 정의하고, 기술위원회 TC 299에서 전용 안전 표준인 ISO 25785-1을 새로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 위원회 초안(CD) 단계이며, 발행은 2026~2027년으로 전망됩니다.
배치도에 펜스 선을 그으려다 멈춘 이유
저는 작업장 평면 배치도에 안전 펜스와 접근 금지 구역을 표기하는 작업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휴머노이드가 들어간 작업장을 같은 방식으로 직접 그려 봤습니다. 고정식 로봇 셀은 간단합니다. 로봇 팔의 최대 도달 반경을 컴퍼스로 돌리고 여유 거리를 더해 선을 하나 그으면, 그 선이 곧 펜스 위치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로봇 차례가 되자 연필이 멈추더군요. 로봇이 이동하면 위험 반경도 함께 이동합니다. 선을 그을 기준점 자체가 없는 겁니다. 표준 논의 단계에서 거론되는 수치를 빌리면, 키 1.7m급 로봇이 초속 1.5m로 걷다 균형을 잃을 경우 전도 반경은 약 2m입니다. 로봇의 이동 경로 전체에 폭 4m의 잠재 전도 구역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뜻입니다. 고정식 로봇의 안전은 도면의 선 하나로 끝나지만, 보행 로봇의 안전은 도면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초안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세 가지 숙제
이 표준은 로봇을 만드는 당사자들이 직접 쓰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리더는 어질리티 로보틱스의 케빈 리스(Kevin Reese)이고,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페데리코 비첸티니(Federico Vicentini), 미국 자동화진흥협회(A3)의 캐럴 프랭클린(Carole Franklin)이 미국 대표단을 이끕니다. 2025년 10월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작업 회의가 열렸죠. 논의되는 핵심은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걷는 로봇의 전도 구역을 계산하는 방법, 짐을 든 상태에서 균형을 회복하는 성능의 최저선, 그리고 전원이 끊겼을 때 로봇이 무너지는 대신 안전한 자세로 스스로 내려앉는 '무동력 안전 자세' 규약입니다. 표준이 없는 지금,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휴머노이드 전용 규정 없이 일반 의무 조항으로 사고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25년 10월 발행된 미국 국가 표준 ANSI/A3 R15.06-2025 같은 합의 표준이 기업들의 사실상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상: 미국 자동화진흥협회(A3) 공식 유튜브 — ISO 25785 표준을 이끄는 세 당사자(A3·어질리티 로보틱스·보스턴 다이내믹스)가 직접 설명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포럼 패널 (2025.11)
공장 다음 관문은 거실입니다
공장은 그나마 통제된 환경입니다. IEEE 스펙트럼이 올해 5월 19일 보도했듯, 가정용 휴머노이드 쪽에서는 12년 된 개인 지원 로봇 표준(ISO 13482)을 손보는 논의가 따로 진행 중입니다. 기사에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이재성 연구원은 '표준화된 방에서, 건강한 성인과, 잘 정의된 조건에서만 안전한 로봇은 진정한 가정용 휴머노이드가 아니다'라고 지적합니다. 거실에는 펜스를 칠 수도, 접근 금지 구역을 만들 수도 없으니까요. 노인의 느린 걸음, 아이의 돌발 행동, 발밑에 굴러다니는 장난감까지가 모두 안전 요구사항의 변수가 됩니다. 규제의 시계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EU에서는 2027년 1월부터 신기계류 규정(2023/1230)이, 같은 해 8월부터는 자율 로봇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는 AI법이 적용됩니다. 표준이 로봇보다 늦게 도착하면, 그 공백은 결국 사고와 소송이 메우게 됩니다.
맺음말
휴머노이드 소식은 온통 스펙 경쟁입니다. 몇 kg을 들고, 몇 시간을 걷고, 백플립을 하는가. 그러나 공장과 가정의 문을 실제로 여는 열쇠는 화려한 시연이 아니라 인증 서류입니다. 자동차가 충돌 시험과 안전벨트 규정을 통과하며 일상의 기계가 됐듯, 휴머노이드도 ISO 25785-1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일터의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아틀라스의 부품 종류를 10분의 1로 줄인 설계가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라면, 이번 표준은 '들여도 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다음에 휴머노이드 데모 영상을 보게 되면 한 가지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로봇이 지금 넘어진다면, 어디까지 쓰러질까요.
참고 자료
- ISO, "ISO/CD 25785-1 — Robotics: Safety requirements for dynamically stable industrial mobile robots" 공식 페이지 — 원문 링크
- There's a Robot for That, "ISO 25785-1: Complete Humanoid Robot Safety Guide for 2026" — 원문 링크
- IEEE Spectrum, Lucas Laursen, 가정용 휴머노이드 안전 표준 기사 (2026.5.19) — 원문 링크
- A3 공식 유튜브, "Defining Safety for Humanoids: Inside the New ISO Standard for Dynamically Stable Robots" (2025.11) — 영상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