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사기 전에 화면 속에서 먼저 써봤습니다 (1편) — 왜 시뮬레이션부터 시작했나
회사 창고 선반에 장비 두 대가 놓여 있습니다. 3D 프린터 한 대, 3D 스캐너 한 대. 둘 다 제가 스펙표만 보고 결제한 것들. 지금은 아무도 켜지 않습니다. 이번에 로봇을 사려다 손이 멈춘 이유는 성능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선반이 먼저 떠올라서였습니다. 스펙표는 다 맞았고, 틀린 쪽은 제 해석이었습니다 발단은 회사 제품이었죠. 우리 제품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시제품까지 뽑아 보려고 3D 프린터 Ender 3와 3D 스캐너 Creality Ferret을 들였습니다. 프린터로 부품을 뽑고 스캐너로 형상을 따오는, 머릿속에서는 꽤 그럴듯한 그림이었죠. 결과는 상용화 실패였습니다. 출력물은 제품으로 쓰기에 정밀도와 강성이 부족했고, 스캐너는 실무에 바로 넣을 만한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뽑아 주지 못했습니다. 두 대 모두 재고가 됐죠. 실패한 뒤에 스펙표를 다시 펼쳐 봤습니다. Ender 3의 공개 사양에 적힌 적층 두께는 0.1mm, 노즐 지름은 0.4mm입니다. 제가 15년을 보낸 금형 쪽에서 도면에 적히는 공차는 그보다 한 자리 아래입니다. 숫자는 처음부터 스펙표에 다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제 일에서 무슨 뜻인지를 몰랐을 뿐입니다. 그때 문장 하나를 배웠습니다. 하드웨어는 써보기 전에는 진짜 성능을 모릅니다. 그런데 써보고 나면 이미 결제가 끝나 있죠. 그런데 사보지 않고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경험이 로봇 앞에서 발목을 잡았습니다. 로봇은 3D 프린터보다 훨씬 비싸고, 종류는 비교도 안 되게 많습니다. 팔 하나짜리 협동로봇부터 사족보행, 사람 형태의 휴머노이드까지 몇 년 전과는 다른 속도로 쏟아집니다. 여기서 또 잘못 고르면 선반에 놓일 물건이 하나 더 늘어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금전적 리스크를 줄이는 일입니다. 어떤 로봇이 제 작업에 맞는지 결제 전에 판단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안목입니다. 로봇팔과 이동로봇과 휴머노이드가 각각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어떤 로봇을 어디에 붙일지 고르는 감...